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8세 (문단 편집) === [[세 황제의 해|왕위를 포기하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에디와 심프슨 2.png|width=100%]]}}} || || 부인 [[월리스 심프슨]]과 함께 || [[1936년]] [[11월 16일]] 에드워드는 [[스탠리 볼드윈]] 총리를 [[버킹엄 궁전]]에 불러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볼드윈은 재혼이 [[성공회]]의 교리와 어긋나고, 국민들이 심프슨 부인이 왕비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전했다. 에드워드는 영국의 국왕으로서 국교회인 성공회의 명목상 수장이었고, 따라서 '''성공회의 교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심각한 헌정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이러다보니 [[캔터베리 대주교]]까지 나서서 결혼을 결사 반대했다. 그러자 에드워드는 [[귀천상혼]]의 형식으로 결혼해 자신은 계속 국왕으로 재위하고, 심프슨 부인은 [[왕비]]가 되지 않으며 둘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녀에게도 왕위계승권을 주지않는 안을 계획했다. 당시 [[윈스턴 처칠]]은 해당 안을 지지했으며,[* 여담이지만 처칠 외에도 [[영국 파시스트 연합]], [[영국 공산당]], 1차대전 참전용사들과 노동자들이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의 결혼을 지지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전 총리는 심프슨 부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에드워드 8세를 지지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처칠이 해당 계획을 수립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처칠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국왕이 교체되는 불상사는 막아보려고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역시 내각과 자치령 정부들의 반대로 실현시키지 못했다. 당시 [[호주]]와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의 총리들은 국왕이 이혼녀와 결혼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전달했고, 심프슨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던 [[뉴질랜드 총리]]는 국왕이 이혼녀와 결혼하려 한다는 사실을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급기야 볼드윈 총리는 '''"이혼을 2번이나 한 이혼녀와 결혼하면서 왕위를 지킬 수는 없다. 왕위를 포기하거나 결혼을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를 골라라. 둘 다 포기하지 않겠다면 내각이 총사퇴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최후 통첩을 날린다. 내각이 국왕과의 의견 차이로 사임하는 것은 입헌군주제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고, 에드워드는 결국 볼드윈 총리에게 '''심프슨과 결혼할 수 없다면 퇴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에드워드8세_퇴위문서.png|width=100%]]}}} || || 에드워드 8세의 공식 퇴위 문서[* 문서 하단에는 에드워드 8세와 그의 동생들인, 차기 왕위를 계승하게 된 [[조지 6세]]를 비롯해 [[글로스터 공작 헨리]], [[켄트 공작 조지]]의 서명이 있다. 조지 6세가 앨버트라는 이름으로 마지막으로 서명한 공식 문서이기도 하다.] || 에드워드는 [[1936년]] [[12월 10일]] 퇴위 문서에 공식적으로 서명했다. 당시 문서에는 "나와 내 후손을 위해 왕위를 포기하겠다는 나의 돌이킬 수 없는 결의와 이 퇴위 문서에 즉시 효력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나의 소망을 선언합니다"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에드워드 8세는 아버지 말대로 고작 10개월 22일 동안 재위한 다음, 결국 "나는 [[월리스 심프슨|사랑하는 여인]]의 도움이 없이는 왕의 책무를 다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로 시작하는 [[https://youtu.be/wBn06A-sdok|세기의 연설]]을 끝으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윈저 공작이 되었다. 영국 언론은 처음에는 왕실의 품위를 위해 에드워드와 심프슨의 연애에 침묵했지만 미국을 포함한 해외 언론들의 보도를 막을 수 없었다.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자 왕이 된 [[조지 6세]]는 부담감 때문에 [[테크의 메리|어머니]]를 찾아가 1시간 동안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퇴위 때문에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엘리자베스 왕비]](조지 6세의 아내)는 에드워드 8세 부부를 매우 싫어했다. 하필 조지 6세의 재위 기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냉전]]이 시작되는 등 [[나폴레옹 전쟁]]과 [[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역사상 가장 급박한 시기였고, 이 때문에 조지 6세는 [[스트레스]]와 줄[[담배]]로 건강을 해쳐서 일찍 죽었다. 엘리자베스로선 에드워드 8세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남편이 고생하다가 일찍 죽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왕족 출신이 아니라서 신분이 낮다고 했을 뿐, 엄연히 친아버지가 백작으로 귀족 집안 출신이었고 과거 행적도 무난했다. 조지 5세와 메리 왕비도 엘리자베스를 직접 만나본 뒤 '이런 처자라면 버티와 결혼할 만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심프슨 부인은 미국 출신인 데다 에드워드와 만나기 전까지의 결혼 생활도 상당히 지저분했다. 아니, 에드워드 본인이 그 지저분의 한 요소였다. 개개인의 실제 성품을 떠나서 이런 대외적인 이미지와 행적만으로도 왕실과 대중들은 엘리자베스보다 심프슨 부인을 더욱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왕세자 시절 [[육촌]]인 [[러시아 제국]] 제1황녀였던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올가 여대공]]과 혼담이 있었다. 만일 이 결혼이 성사되었다면 에드워드 8세가 훗날 [[월리스 심프슨|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의 공주랑 결혼한 상태에서 미국인 평민을 왕비 자리에 앉히겠다고 난리치는 군주는 없을 테지만, 여자 때문에 왕위까지 내던진 에드워드 8세의 행각상 정말 올가와 결혼한 상태에서 이혼을 감행했다면 제2의 [[헨리 8세]] 사태가 됐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랬으면 자진 퇴위가 아니라 쫓겨났겠지만...] 즉, 현재의 [[찰스 3세]] 왕정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 거기다 올가와 에드워드의 혼인이 무사히 진행되었다면 에드워드의 아버지 [[조지 5세]]가 [[러시아 혁명]] 때 차르 일가의 구조를 망설이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